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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에 대한 모든 것

hazle ray 2023. 2. 7.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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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南漢山城)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에 있는 남한산을 중심으로 하는 산성이며 도립공원이다.  병자호란 때 조선의 16대 왕 인조 청나라에 대항한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1950년대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공원화된 후 현재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많은 시민이 찾는 장소가 되었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이곳에서 40일간 항전하였으나 결국 성문을 열고 청에 항복한 곳으로 유명하다.

남한산성은 과거 한양을 지키던 4대 요새 중 하나이다.

북쪽의 개성, 남쪽의 수원 (화성), 서쪽의 강화, 동쪽의 광주(남한산성)이다.

 

 

 

수원 화성과 마찬가지로 광주 남한산성 주위에는 지금은 먹거리들이 유명하고 드라이브 코스로도 손꼽힌다.

많은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훌륭하다.

성길을 따라 많은 맛집이 있고 뭔가 남한산성이 주는 긍정적인 기운과 에너지가 있다.

남한산성은 각종 시설이 잘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이 잘 정비된 곳으로 손꼽히며, 험한 지형을 활용, 성곽과 방어시설을 구축함으로써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축성술의 시대별 발달단계를 잘 나타내는 좋은 자료로 인정받아 2014년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한다.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없으나 조선 '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 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춘 것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1624)이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뒤 지속적으로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시설은 동·서·남문루와 장대·돈대·보 등의 방어시설과 비밀통로인 암문, 우물, 관아, 군사 훈련시설 등이 있다. 이곳에는 백제 전기의 유적이 많이 있어 일찍부터 백제 온조왕 때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라고 현지 안내문에 간략한 설명이 나와 있다.

 

 

 

남한산성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남한산성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세운 성으로 알려졌으나, 신라시대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직전인 1907년에 일본군에 의해 다수의 건물이 훼손되기도 했다.

다른 말을 섞자면 우리나라의 문화재들은 다 일제강점기 시대 때 많이 훼손됐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참 위기에 강한 나라였고, 나라이다 라는 걸 이런곳에서 많이 느낀다.

 

 

 

수원 화성은 산에 있는 성이 아니라 마을을 감싸는 성이었다면 남한산성의 전반적인 지형은 청량산과 남한산이 중심이다.

게다가 성안에는 45개의 연못과 80여 개에 달하는 샘이 있어서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아 장기간 농성에 유리하다고 나와 있다.

그래서 남한산성 내부의 취락은 고도가 높고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에 있다는 측면에서 다른 지역과 확연히 구별되는 입지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남한산성은 경제적 이용, 군사적 이용이 용이했다.

일시적 방어 요새로만 기능하는 다른 산성과는 달리 조선 시대와 일제 강점기에 광주 군청이 설치될 정도로 행정의 중심지이자 지역 중심지로 기능해왔다. 또한 남한산성 내부의 취락은 고도가 높고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에 있다는 측면에서 다른 지역과 확연히 구별되는 입지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산성 안에 대규모 행정 중심지가 형성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식수를 구하기 쉽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비록 군사적인 필요에 의해 개발했지만, 산성 내에는 적지 않은 수의 우물이 있었을 만큼 수원이 풍부하였다. 하지만 초기에는 선뜻 남한산성으로 이주하려는 사람들이 없어서 모집하게 되었으며, 초기 이주자 중 일부는 죄를 지어 변경으로 송치할 대상도 포함되었다. 이 결과 300여 호에 달하는 민가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이후로 모집은 계속되어 숙종 대에는 600여 호가 성내동에 거주하게 되었다.

 

 

 

남한산성의 성문은 동서남북으로 동문, 가장 사용 빈도가 많았고 다른이름으로는 좌익문이라고 한다.

서문 다른이름으로는 우익문이라 한다.

동문의 이름이 좌익문인 것은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이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펴 좌익문이라 하였고, 자연스럽게 서문의 다른 이름이 우익문이 된것이다.

남문은 4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 있으며, 정조 3년에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되어 지화문으로 이름 붙여졌다.

북문은 성곽 북쪽의 해발 365m 지점에 위치해 있고 전승문이라고 한다.

북문은 1779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고 이름을 붙여 전승문이라 칭하였다.

'전승문'이란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인데 현재 편액은 걸려있지 않다.

 

 

또 남한산성에 암문이 있는데 남한산성에 16개가 있다고 한다. 

한국 성곽 중에서 가장 많은 암문을 가지고 있다고 나와있다. 

암문의 목적은 적이 관측하기 어려운 곳에 만든 성루가 없는 성문인데 은밀하게 식량과 무기를 운반하거나 원군이나 척후병이 출입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크기가 작고 장식이 없고, 안쪽에 쌓은 옹벽이나 흙은 유사시에 무너뜨려서 암문을 폐쇄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이렇게 남한산성을 좋아하는 내가 역사적인 공부를 하면서 블로그 글에 남기니 신기한 사실들이 많다.

일제강점기때 훼손당한 문화재, 성문마다 뜻이 있고 역할이 있었던 게 너무 신기했다.

우리나라는 아주 오래전 과거부터 전쟁과 식민생활을 했다.

화성과 남한산성 같은 성곽은 과거 적들에 대해 우리 백성들을 지키는 용도였으며 남한산성 설명에 나와 있는 암문처럼 은밀하게 사용 용도가 있기도 했다.

서쪽의 강화, 북쪽의 개성에 대한 남은 포스팅을 진행하고 우리나라 성뿐 아니라 해외의 성들도 궁금해졌다.

다음 포스팅 때는 좀 더 넓은 세계관으로 공부하고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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